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글이라서 함께 공유합니다.
이오갑 (강서대학교)
공동체는 한문으로 共同體인데 함께 共, 같을 同, 몸 體를 쓴다. 함께 같이 있는 몸이라는 뜻이다. 서양어로는 comunity이다. ‘함께’라는 뜻의 com과 일치라는 unity의 합성어로서, 함께 일치를 이루었다는 뜻이다. 용어로서 공동체는 각각이 함께 하나를 이룬 곳(것), 또는 함께 하나를 이뤄가는 곳(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각각이 함께 하나를 이룬다는 것은 무엇일까? 각각이 함께 이룬 공동체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가장 작게는 부부라고 할 수 있다. 조금 더 넓게는 가정, 사회, 교회, 국가, 인류... 그런 식으로 더 넓혀갈 수 있다. 그래서 공동체는 다른 말로 사회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사회는 형태를 표현한 말이고, 공동체는 성격을 표현한 말이라는 차이가 있다.
부부공동체, 가정공동체, 교회공동체, 사회공동체, 인류공동체... 식으로 함께 붙여 쓰기도 한다. 부부라고 해도 진정으로 함께 하나를 이루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가정이라고 해도 함께 하나를 이루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많은 교회들이, 그 안에서 갈등하고 분파를 만들고 분열해서 갈라지는 일도 있다. 사회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사회공동체, 국가공동체라고 말은 하지만, 정말 사회구성원들이 함께 하나를 이루는 경우는 드물다. 사회구성원들이 같이 살기는 살아야 하기 때문에 같이 살지만, 마지못해서 같이 살고, 싸우면서 같이 산다. 인류공동체 역시 마찬가지이다.
성경은 인간을 동떨어진 개인으로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했다(창1:27)”는 말씀이 그것이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2:18)”의 말씀도 그것이다.
창 1장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만들었다. 하나님은 엘로힘-복수의 형태로 표현된다. 그리고 또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다는 것도 복수의 존재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창 2장에서, 최초로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 그는 개인으로 태어났지만, 그가 개인으로 혼자 존재하는 한 “좋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돕는 배필, 도움을 받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를 만들었다. 남자와 여자로 함께 서로 의지하고 도와가면서 살 때, 그런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게 되었을 때, 비로소 만족스럽고, 보기에도 좋고, 그들 스스로도 행복했다.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자기의 파트너를 처음 만났을 때 아담이 기쁨에 차서 외쳤던 말이 그런 만족감, 충만한 행복을 표현해준다.
사람이 태초부터 공동체적으로 태어나고 살아가도록 운명지어졌다는 의미이다. 공동체를 이룰 때, 서로가 서로를 돕고, 서로가 서로를 좋아함으로써 하나가 될 때, 가장 큰 행복과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가장 좋은 상태라는 것이다.
반면에, 공동체가 붕괴되고, 각 개인들이 분열되고 갈등하고 싸우는 것은 죄의 결과로 이해된다.
아담과 하와가 이루고 살았던 공동체는 어떻게 붕괴되었을까? 그들이 죄를 짓고 나서, 같이 살기는 살았지만, 내적인 관계는 파괴되었다. 서로 하나를 이루었던 것이 사실상 둘이 되고, 그것도 그 둘의 거리가 아주 먼 상태, 관계가 소원해진 상태가 되었다.
하나님이 범죄하고 숨은 아담과 하와를 찾아내서, 왜 “먹지 말라고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먹었느냐”고 물었을 때,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고 대답했다. 말은 맞지만, 죄의 책임을 여자에게 뒤집어씌우는 얘기이다. 자기는 책임이 없고, 책임이 있는 건 여자라는 얘기이다. 그것도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그 여자!” 이 여자도 아니다. 그 여자이다.
죄를 짓기 전에는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자기보다도 더 자기 같았던 여자가 이제는 내 대신 벌을 받고 죽어줘야 할 “그 여자”가 된 것이다. 심리적 거리가 멀어졌다. 몸은 같이 살아도, 마음이 둘이 되고 말았다. 내가 살기 위해서 네가 죽어야 하는 관계이다.
공동체로부터, 또는 사회로부터 쫓아내는 것은 죄에 대한 심판이기도 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을 때 사람들의 사회로부터 쫓겨났다. 그는 “지면으로부터 쫓겨나서 ...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되었다.” 사람을 만나도 그가 나를 “죽일까 염려해서 피해 다녀야 하는” 신세이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죽게 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을 피해서 떠돌아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공동체에 속해서 함께 하나를 이루며 살아가는 삶이 허락되지 않았다.
공동체의 붕괴가 죄의 결과라면, 왜 그런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공동체 파괴가 죄의 결과라는 것은 죄가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말이다. 죄가 핵심이다. 죄를 알아야 하는 이유이다. 파괴된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도 죄를 알 때 가능하다. 죄를 알고, 죄를 극복해야 파괴된 관계를 다시 잇고, 붕괴된 공동체를 다시 복구할 수 있다.
죄가 무엇인가? 죄는 여러 가지가 있다. 기독교에서는 죄에 대한 개념이 다르다. 사회에서는 형법이 정한 항목을 저촉한 행위를 죄라고 한다. 행위를 저질러야 죄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행위로 나타나지 않아도, 또는 일반적으로는 모범적이고 도덕적인 행위라고 해도, 죄일 수 있다.
왜 그럴까? 기독교에서는 죄를 마음의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죄는 마음에서 비롯되고, 또한 잘못된 그 마음 자체이다. 기독교에서 죄를 ‘교만’ ‘불신앙’ ‘불순종’ ‘반역’ 같은 것들로 보는데, 전부 마음에서 비롯되고 또 마음의 현상 자체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마음의 현상은 모두 하나님(절대 타자)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타자들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간단하게, 타자에 대한 마음의 상태이다. 그래서 죄는 관계의 문제이고, 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이다. 다른 말로, 죄는 타자와의 관계의 대상에 대한 것으로서, 타자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몸이나 상태를 괴롭게 한다. 죄가 교만이라는 것은 자기가 타자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고, 불신앙이라는 건 사사건건 타자를 믿지 않고 의심하는 것이고, 불순종이라는 건 겸손하게 상대를 듣고 존중하고 따르지 않고 내 식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죄를 한 마디로 ‘자기중심주의’라고 할 수 있다. 전부 자기가 중심이고, 자기가 위이고, 자기가 절대이고, 자기만을 위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그 자기중심주의-이기주의 같은 것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파괴하지만, 다른 모든 관계도, 즉 공동체도 –가정이든, 교회든, 사회든, 국가든– 파괴하는 요인이다.
그래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어떤 이념이나 이상을 실현하는 것에 앞서서,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가진 그런 자기중심주의-이기심을 극복하는 데 있다. 이 죄의 문제가 해소되거나 해결되는 과정이 없이는 아무리 거창한 뜻을 앞세운다 해도 공동체를 성사시킬 수 없다. 역사상 가장 공동체성을 강조했던 공산주의가 실패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인간 죄성의 깊이를 간과한 낙관주의 또는 이상주의의 귀결이다.
공동체를 위해서 자기중심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자기중심성, 이기심을 극복하는 것을 기독교에서는 ‘자기부정 renoncement à soi / self-renunciation’이라고 한다. 그런데 자기부정이 가능할까? 어떻게 가능할까? 이것이 인간(류)의 영원한 과제이고 숙제인데, 기독교에서는 예배와 말씀과 기도, 자기성찰, 코이노니아, 디아코니아 등의 복합적인 노력을 통해 -그 중심에는 성령의 특별한 도우심과 인도가 있다- 이뤄간다고 본다. 다른 말로 교회(그리스도인들)의 영성과 사회성의 균형 있는 추구를 통해, 그러나 성령의 역사와 은혜로써 조금씩 이뤄간다고 본다.
그러나 공동체를 위해서 또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공동체가 만능일까? 공동체를 위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다 해도 될까? 이제까지 많은 공동체가 있었는데, 대개는 실패로 돌아갔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 대답을 위해서는 인간이라는 조건 또는 특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람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태어나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 자신만의 고유한 인격과 개성을 가진 존재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한꺼번에 다 창조한 게 아니라, 아담과 하와를, 남과 여를 각각 창조하셨다. 개체로 태어나고, 각자 다 자기 이름으로 살아가고, 또 죽을 때도 혼자 죽는다. 자기 자신은 지구상의 그 어느 누구로도,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 개인이 그만큼 중요하고, 그 자신으로 봐서는 절대적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나의 개인-개체가 중요한 만큼 다른 사람들의 개인-개체도 그렇다.
그래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것은 폭력이고 죄이다. 어떤 이념이나 이상으로도, 어떤 명분으로도 개인을 억압하거나 희생시킬 수 없다. 현대사회에서는 종교는 물론이고 국가도 그럴 권리가 없다. 원칙적으로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렇다. 그것이 근대 민주주의 사회를 가져온 인권선언들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국가는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사회나 공동체는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법(과 규범)으로써이다. 법은 강제이고 구성원들에 대한 제약의 성격을 갖지만, 국민이 필요하다고 인정해서 스스로 그렇게 하기로 제정한 것이다. 즉 국민들의 자발적인 동의로써 (국민들을 대신한 국회의원들을 통해서) 제정된 법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손해이고 불편한 일이어도 세금과 병역 등 국민의 기본 의무들을 이행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양심적 병역거부-대체복무-’라든지 ‘홈스쿨링’ ‘대안학교’ 등이 인정되는 데서 보듯이, 국가의 강제력 아래서도 개인적 선택이 보다 존중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추세이다.
공동체가 먼저일까, 개인이 먼저일까? 라는 질문은 사실 진부하다. 답도 뻔하다. “하나를 위한 모두, 모두를 위한 하나”라는 표현 속에 들어있다. 무엇이 먼저랄 것도 없이, 공동체가 개인을 위해야 하고, 개인이 공동체를 위해야 한다. 개인을 위하기 위해서라도 공동체를 위해야 하고, 공동체를 위하기 위해서서라도 개인을 위해야 한다. 뻔한 얘기 같지만, 평범함 속에 진리가 있다.
공동체에 대한 의욕이 강하거나 앞설 때는, 개인을 억압하고 개인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다. 개인에 대한 의욕이 강하면 사람들 사이의 결속을 해치고 공동체를 저해할 수 있다. 그래서 개인도 위하고 동시에 공동체도 위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둘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있게 추구할 방법이다.
참고로, 사람들의 모듬살이를 생각해보자. 사람들의 모듬살이는 대개 셋으로 구분될 수 있다.
1. 도시city이다. 도시는 개인이 보호되고 존중되는 사회이다. 개인의 자유가 제일 많이 허용되고. 개인의 독립성과 익명성도 강하게 보존된다. 그래서 개인들이 몰려들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밀집된 공동주택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사람들은 많아도 다 독립된 개체들이고 상호관계가 약하고 별무한 개인들이다. 자유가 많아서 좋고 편하지만, 고독하고 단절된 삶을 산다. 그만큼 불안하고, 관계의 기쁨이 없어 쉽게 우울해지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2. 집단collectivity이다. 집단은 개인이 말살되고 전체만 보호되고 추구되는 사회이다. 구성원간의 결속과 단결, 질서가 강조된다. 심지어는 서로 깊이 간여하고 간섭하기도 한다. 집단이 책임져준다는 이유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사적인 영역에도 끼어들려고 한다. 어떤 특별한 목적을 달성하고자 효율성과 행동통일을 중시하는 목적중심의 사회, 가령 군대, 검찰 같은 사회에서, 나쁘게는 조폭집단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사회가 국가적으로 이뤄지면, 일제의 군국주의나 나치즘의 국가사회주의 같은 집단주의, 전체주의가 된다. 거기서 개인의 자유는 말살되고, 개인들은 국가의 목표를 위해 철저하게 사용되고 동원되는 수단에 불과하다.
3. 공동체community이다. 공동체는 개인과 집단의 균형이 잘 이뤄진 사회이다. 개인의 자유와 인격, 개성이 존중되며, 동시에 개인들 간의 사랑과 유대가 강조된다. 개인의 자유의 선택으로서의 사랑이고, 결속이며 공동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개인들의 자유로운 선택으로서의 사랑만이 진정한 일치와 연합, 즉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 공동체 안에서 개인들은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사랑(참여)하고, 그럼으로써 개인들이 서로 좋아하는 가운데 결속을 이뤄간다. 그렇게 자유를 바탕으로 한 사랑과 참여, 나눔으로써 공동체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와 사랑이 공동체를 향한 길이고, 방법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희생,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써 변화된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자유롭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타자들을 사랑함으로써 크게 하나를 이뤄가는 공동체이다. 즉 본질적으로 교회가 바로 “자유와 사랑의 공동체”이다.
자유와 사랑의 공동체의 존재이유를 찾아보자.
인간은 세상에 살면서 항상 두 가지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다.
하나는, 국가나 사회나 또는 어떤 이념이나 이상을 위해서 개인의 자유가 제한되거나 말살될 위험이다. 전체주의, 국가주의, 집단주의 또는 독재국가 같은 사회에서 그렇다. 그런 사회는 전체를 위해서 개인의 희생을 미화하며 강요하고, 강한 법과 수많은 의무들로써, 괜한 금지와 터부들로써 개인들을 묶어놓는다. 항상 “무엇을 해야 한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의 ‘당위(must)’가 언어와 사유, 행동의 중심 구조를 이루고 있다. 예수님이 부딪혔던 유대교 사회가 그랬고, 조선의 유교사회, 억압적인 이슬람 사회 같은 종교-신정정치 같은 데서도 그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21세기 최첨단 현대사회에서도 그런 잔재, 위험성을 발견할 수 있다.
또 하나는, 개인의 자유와 이익을 위해 사회를 희생시키게 될 위험이다. 다들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가며 남들이나 사회는 어찌 되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남들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과 투쟁의 대상이고, 내가 소유할 재화나 힘에 대한 잠재적 도전자이고 침탈자일 빠름이다. 남들을 좋아하고 남들과 관계를 맺어도, 언제나 자신에게 좋고 유리하다는 조건에서이다. 자본주의와 근대 이후 형성된 개인주의가 잘못 결합된 사회에서 그런 특징이 나타난다. 천민자본주의랄까. 그런 사회에서는 경제행위와 정치행위 심지어는 교육이나 종교행위도 행위하는 개인을 위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사회는 약육강식, 적자생존, 각자도생의 정글과 같은 곳으로 전락해서, 힘없는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너무나 위험하고 불안한 곳이 된다. 사회정의나 사회적 연대, 공동체성, 사회 안전망, 다른 말로 이웃에 대한 사랑과 연민, 나눔, 봉사, 희생 같은 건 학교에서도 잘 가르쳐주지 않는 옛 시대의 유물 같은 걸로 전락할 수 있다.
끝으로, 다소 투박하고 거칠게라도 성경얘기를 해본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사랑해서 구원하시고자 세상에 오셨다. 죄인들을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셨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에서 진리(알레세이아)는 예수님 자신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랑, 자기희생이 사람들로 하여금 죄인인 자신들을 보게 하고, 알게 하고, 부끄럽게 하고 – 성령의 역사와 함께 – 옛 자신, 죄인으로부터,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신다. 그리고 이제는 죄인임에도 자신들을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고 따르게 하신다. 그 믿음과 사랑, 그리스도를 따름은 억지로나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주며 사랑해주신 예수 그리스도-하나님께 감사하고 감격해서, 기꺼이 마음에서 우러나서, 자유로이 하나님과 이웃들을 사랑하게 된다.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는 것도 구원이지만, 현재 세상에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자신을 사랑하며 자신(주체)을 구현하는 것과, 또한 하나님이라는 절대 타자를 사랑하며 그 모든 타자들인 이웃생명들을 자유롭게(자발적으로) 사랑함으로써 공동체를 이루어 평화롭게 살아간다면 그것이 또한 구원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자유와 사랑으로써 이웃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룬 것 그것이 바로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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